섭정과 프롱드의 난, 1643–1661
1643년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전쟁 중이었고, 세금은 무거웠으며 많은 농민이 가난했어요. 왕이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 안 도트리슈가 이탈리아 출신의 마자랭 추기경과 함께 섭정을 맡았어요.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롱드의 난이라 불리는 반란이 이어졌어요. 먼저 파를르망(높은 법원이에요. 의회와는 달라요)이 새 세금을 거부했어요. 그다음 콩데 같은 대귀족들이 자기 권력을 위해 싸웠어요. 왕실은 파리를 떠나 도망쳐야 했지요. 반란군은 서로 갈라져 있었고, 1653년에는 왕실이 이겼어요. 루이는 이때의 두려움을 평생 잊지 않았어요.
마자랭은 피레네 조약(1659)으로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끝냈고, 루이는 에스파냐 공주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어요.
나라 안의 절대왕정 세우기, 1661–1685
절대왕정은 왕이 가장 높은 권력을 갖고 오직 신에게만 책임진다는 뜻이에요(왕권신수설). 하지만 실제로 루이는 귀족, 교회, 지방 단체와 함께 일해야 했어요.
- 친정: 1661년 마자랭이 죽은 뒤 루이는 재상을 두지 않았어요. 너무 부유했던 재무 책임자 푸케는 체포되었어요.
- 회의와 대신: 작은 고등 회의와 새로운 가문 출신의 믿을 만한 대신들(콜베르, 루부아)이 있었어요.
- 앙탕당: 지방에 보내 세금, 재판, 군대를 살피게 한 왕의 관리예요.
- 베르사유: 1682년부터 궁정이 그곳에서 살았어요. 귀족들은 의식 속에서 왕의 눈에 들려고 경쟁했고, 반란을 꾸밀 시간이 줄었어요.
- 이미지: 예술, 건물, 메달, 태양 상징으로 왕이 전능해 보이게 했어요.
- 콜베르와 중상주의: 해외에 파는 것이 사 오는 것보다 많게 하고, 관세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며, 도로, 운하(미디 운하), 공장, 해군을 만들었어요.
루이 14세와 유럽, 1661–1685
루이는 글루아르(영광)와 더 안전한 국경을 원했어요. 에스파냐와 벌인 왕위 계승 전쟁(1667–68)에서는 플랑드르의 도시들을 얻었어요. 네덜란드 전쟁(1672–78)에서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공격했는데, 네덜란드는 땅에 물을 채워 막았어요. 네이메헌 조약(1678)으로 프랑스는 프랑슈콩테를 얻었어요. 1680년대에는 레위니옹이라 불리는 법적 주장으로 스트라스부르(1681) 등 더 많은 도시를 차지했어요. 많은 통치자가 프랑스의 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어요.
나라 안의 어려움, 1685–1715
- 종교: 퐁텐블로 칙령(1685)은 낭트 칙령을 없애고 개신교(위그노)의 권리를 빼앗았어요. 약 20만 명의 위그노가 떠났고, 그중 많은 사람이 기술자였어요. 루이는 교황, 그리고 엄격한 가톨릭 집단인 얀센파와도 다퉜어요.
- 돈: 전쟁 비용이 세금 수입보다 훨씬 컸어요. 인두세 카피타시옹(1695)과 디지엠(1710) 같은 새 세금은 귀족에게도 걷었어요.
- 굶주림: 1693–94년과 1709–10년의 기근으로 아주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 비판: 일부 작가들이 영광을 위해 치르는 비용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유럽에서의 도전과 프랑스의 패배, 1685–1715
9년 전쟁(1688–97)에서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이끄는 큰 동맹이 프랑스와 싸웠어요. 리스윅 조약(1697)으로 루이는 1678년 이후 얻은 땅의 대부분을 돌려주어야 했어요.
1700년 에스파냐 왕이 죽으면서 제국을 루이의 손자 필리프에게 물려주었어요. 다른 강국들은 한 가문이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함께 다스리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에스파냐 계승 전쟁(1701–14)에서 프랑스는 블렌하임(1704) 같은 큰 패배를 겪었어요.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필리프 5세는 에스파냐 왕위를 지켰지만 에스파냐를 프랑스와 합칠 수는 없었고, 영국은 무역과 땅을 얻었어요. 1715년 루이가 죽을 때 프랑스는 여전히 가장 강한 육지 강국이었지만 빚이 깊었어요.
해 보기: 권력과 빚
'연도'와 '10년 전보다 루이가 더 강했나, 약했나?' 두 칸짜리 표를 만들어 보세요. 1653, 1663, 1678, 1697, 1715년을 채워요. 그런 다음 3D 슬라이더로 답을 확인해 보세요. 태양은 권력, 빨간 막대는 빚을 보여 줘요.
핵심 공식과 정의
- 절대왕정 = 군주가 최고 권력을 갖고 오직 신에게만 책임진다
- 왕권신수설 = 왕의 권력은 신에게서 온다는 생각
- 프롱드 = 법원과 귀족의 반란, 1648–53
- 앙탕당 = 지방을 다스리도록 보낸 왕의 관리
- 중상주의 = 수출은 늘리고 수입은 줄이며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
- 위그노 = 프랑스 개신교도
- 글루아르 = 왕의 영광과 명성
풀이 예제
1. 프롱드의 난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반란 세력이 갈라져 있었어요. 파를르망은 세금에 법적 제한을 원했고, 귀족들은 자기 권력을 원했으며, 서로를 믿지 않았어요. 마자랭은 거래로 그들을 갈라놓았고 왕의 군대는 충성스러웠어요. 또 오랜 혼란 끝에 많은 사람이 질서를 원했어요.
2. 베르사유는 루이가 귀족을 다스리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대귀족들은 궁정에서 살아야 했어요. 그들은 의식과 왕의 작은 호의를 얻으려는 경쟁에 시간과 돈을 썼고, 자기 지역에서 힘을 키울 시간과 돈이 줄었어요. 루이는 충성하는 사람에게 관직과 연금을 주었어요.
3. '루이 14세의 전쟁은 프랑스에 득보다 해가 컸다.' 이 의견을 평가해 보세요.
초기 전쟁은 이득이 있었어요. 프랑슈콩테와 스트라스부르를 얻고, 국경이 안전해졌으며, 위신이 크게 올랐어요. 하지만 1688년 이후 큰 동맹과 싸운 전쟁은 얻은 것이 적었고(리스윅), 큰 빚과 높은 세금, 기근의 고통을 가져왔어요. 위트레흐트에서 에스파냐에 부르봉 왕가를 지켰지만 대가가 컸어요. 전체적으로 후기 전쟁의 해가 초기 전쟁의 이득보다 컸어요.
자주 하는 실수
- '절대'라는 말을 루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 그도 귀족, 관리, 교회, 지방 단체의 협력이 필요했어요.
- 프랑스의 파를르망(법원)을 선거로 뽑은 의회와 헷갈리는 것.
- 루이가 유명한 연설에서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좋은 증거는 없어요.
- 1715년의 프랑스가 망하고 약했다고 생각하는 것. 빚은 많았지만 여전히 서유럽에서 가장 큰 강국이었어요.